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국제입양과 인종차별
레베카켄달


By Rebecca Kendall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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40 년동안 인종적 다수파에 속하다가 하루아침에 인종적 소수파가 되는 것은 참 특이한 경험이다 . 코카시안 여성으로서 나는 내가 인식조차 하지 못했던 익명성의 혜택을 그동안 누렸으나 , 2004 년 4 월 7 일 6 개월된 한국인 남자아기가 내 품에 안겨지는 순간 , 그리하여 내가 어머니가 되는 순간 , 이것은 순식간에 바뀌어버렸다 . 그보다 9 개월 전 , 남편과 함께 홈스터디 과정을 꾸준히 하고 있는 가운데 , 우리 입양대행소가 초인종가정에서 흔히 발생하기 쉬운 이슈들에 대해 우리를 준비시켜주었다 . 여기에는 성장과정에서 겪어야 했던 도전들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았던 젊은 한인 입양아들과의 눈이 번쩍 뜨이게 하는 만남도 포함되어있었다 . 우리는 우리 소셜워커에게 우리의 개인생활에 대한 침투와 인종차별주의에 대한 준비가 진실로 되어있다고 장담했다 . “ 아무려면 , 때가 21 세기 뉴욕인데 , 나빠본들 얼마나 나쁠까 !” 하고 나는 생각했다 . 마지막 명언이었다 .

우리는 우리 아들과 만나기 위해 서울로 갔다 . 처음 외출했을 때 , 우리는 여인네들이 우리 아들의 뺨을 꼬집거나 매만져주고 , 남자들은 사탕을 주면서 , 우리 아들이 ‘ 복이 많은 아기 ’ 라고 하는데 금방 익숙해졌다 . 한국 사람들은 고아들의 신분에 대한 문화적 갈등을 겪는 가운데 있었고 , 나와 내 남편은 그들의 이 투쟁에 현실문제로 다가섰던 것이었다 .

뉴욕으로 돌아왔을 때 , 가끔 여기저기서 관심을 끌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( 어머니가 된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러듯이 ), 매일 내가 감당해야만 했던 반응의 폭격으로 나는 압도당했다 . 대부분 사람들은 예의바르게 대했지만 , 대화는 어쩔 수 없이 “ 아기가 참 귀엽지만 , 진짜 어머니가 이 아기를 버린것을 믿을 수 없어 . 어쩌면 그럴수가 있어 ?” 이런 말들로 이어지기 일쑤였다 . “ 그 사람들은 딸을 바라지 않는다던데 , 어떻게 아들을 구할 수 있었어요 ?” 하는 말을 한번 들을때 마다 1 달러씩을 모았다면 아마 대학을 보내고도 남을 돈이 모였을 것이다 . 수십명의 사람들은 아기의 출생이야기를 듣고싶어했고 , “ 아기를 데려오는데 든 돈 ’ 이 얼마인지 알고싶어했다 . 어느 한 젊은 여성은 “ 온라인으로 주문을 했는지 …. 있잖아요 , 인터넷에서 바로 구해오는것 .” 이라고까지 물어보기도 했다 .

이런 그릇된 정보에 근거한 질문들에 너무나 놀란 나머지 나는 종종 내가 오히려 설명을 들어야 할 입장인 것 처럼 행동했다 . 입양에 대해 옹호하는 사람으로서 , 나는 기꺼이 사람들을 계몽할 의사가 있지만 , 이런 도에 지나친 일들을 하도 당하다 보니 우리 아들의 이야기는 자기 자신 이 외에는 다른 사람들이 간섭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. 신기하게도 내가 이런 비뚤어진 개인적 질문들에 대해 익숙해져갈수록 , 우리는 더더욱 공공연한 인종차별을 경험하기 시작하게 됐다 .

순진하고 악의가 없는 사람들조차도 ‘ 긍정적 인종차별 ’ 이라고 알려진 태도를 보이는 것이 그다지 보기 드문 일이 아니었다 . 암시되어지고 있는 기대감에 대한 은근한 압력으로 인해 보다 공공연하게 인종차별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이 긍정적 인종차별 역시도 피해를 주는것은 마찬가지다 . 예를 들어 , 우리 의사는 내가 한국에서 아이를 입양해왔다는 것을 알고는 아시아 국가를 선택한데 대해 축하를 해 주며 말했다 . “ 그 사람들은 똑똑하고 존경심 있는 민족이니까 , 따라서 부모노릇을 하기가 훨씬 쉬울 것이다 ” 라고 .

우리 아들이 18 개월 되었을 때 처음으로 직접 ‘ 부정적인 인종차별 ’ 을 당했다 . 우리는 이웃에 있는 놀이터에서 놀고 있었는데 , 그 때 좀 더 나이가 많은 아이가 우리 아들을 보더니 놀던 것을 멈추고 손으로 눈을 찢으며 “ 차이니이즈 , 차이니이즈 !” 하면서 우리 아기 주변을 돌며 소리지르기 시작하는 것이다 . 우리 아기는 겨우 걸음마하는 아기에 불과했으나 , 무엇인가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. 그리고 그것이 자신에 관한 것임을 알았다 . 아기의 얼굴에 나타난 놀라고도 혼동된 표정을 본 순간 나는 숨이 멎는듯 하면서 , 가슴이 찢어지고 말았다 . 훨씬 더 나에게 절망적이었던 것은 , 그러한 증오로부터 보호해 줄 수 있도록 늘 우리 아기곁에 있어 줄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였다 . 그 아이에 대한 내 반응에서 판단해 볼 때 , 내가 얼마나 효과적으로 잘 수 있을 것인지 자신도 없었다 .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반응이라고는 “ 이 아기는 한국계 미국인이야 !” 하고 소리 지르는 것 뿐이었기 때문이었다 .

지금은 세살 반이 된 내 아들로부터 나는 원하지 않는 질문들을 다루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. 그냥 아들에게 솔직히 물어보는 것이다 . “ 저 질문에 대답하고 싶니 ?” 대개의 경우 그의 대답은 간단하다 . “ 아니오 .”

“ 그 질문에 지금 대답하고 싶지 않다는데요 .” 이렇게 질문자에게 말하면 , 더 이상 질문이 나오는 것을 효과적으로 막아버릴 수 있다 .

지금은 초인종 가정의 일원이 된데 워낙 익숙해져서 우리 아들을 동반하지 않고 그저 한사람의 백인 여성으로서 뉴욕시 거리를 걸어다니는 것이 이상할 지경이 되었다 . 나는 내 가정 , 그리고 사람들에게 국제입양에 대해 계몽하는 것 사이에 균형을 잡으려 지금도 계속 노력중이다 . 그 가운데 나는 프리스쿨에 다니는 이 현명한 아들로부터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많은 것들을 배우고 있다 .

한국에 있는 김치를 모두 다 준다고 해도 나는 예전의 눈에띠지 않는 존재로 되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.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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